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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묵X유연] 그 여름 아래에서

W. 채은

 

 

― 같이, 별이라도 보러 갈래요?

 

그 말이 시작이었다. 유연은 기꺼이 허묵이 내민 손을 맞잡고 바닷가를 향했다. 제작사의 여름휴가. 여름휴가의 대명사는 바다였다. 연모시 외곽에 위치한 바닷가에서 휴가를 보내자는 계획을 열심히 짜던 제작사 식구들은 허묵을 초대하면 어떠냐는 제안을 유연에게 건넸고, 유연은 그 의견을 받아들였다. 이번 분기 프로그램의 흥행에 대한 일등 공신은 단연 고정 게스트인 허묵이었으니, 그를 부르는 일은 꽤 자연스러웠다―물론 유연에게는 파트너 그 이상의 사심이 담겨 있었지만―. 유연은 빠르게 그에게 문자를 보냈다.

[교수님, 이번에 사내 여름휴가를 가는데, 교수님도 오실래요? 분명 재미있을 거예요!]

 

곧 그에게서 긍정의 답변이 돌아왔다. 다른 일정과 겹치지 않으면 기쁜 마음으로 가겠다는 내용이었다. 유연은 핸드폰을 쥐고 싱긋 웃었다. 회사니까, 조금은 감추어야지. 그리 생각하며 새어나오는 웃음을 꾹 눌렀지만, 직원들은 모두 유연의 표정을 보고도 허묵의 참가 여부를 알아차릴 수 있었다. 이건, 한참 나중에 밝혀진 이야기지만.

술에 얼큰하게 취한 직원들은 일찌감치 펜션을 빠져나갔다. 바베큐장을 떠나려던 예준이 뒤를 돌아 유연을 재촉했다. 동창! 빨리 가자, 이런 날에 술이 더 없으면 재미없지! 유연은 어, 어어…, 하며 말끝을 흐리면서 제 옆에 앉은 허묵의 눈치를 보았다. 허묵은 그녀의 손을 잡으며 싱긋 웃었다. 분명 사람 좋은 미소였지만, 그 속에 담긴 저의는 오롯하게 유연만이 알아차릴 수 있었다. 가면 안 돼요.

 

“머, 먼저 가서 놀아. 난 나중에 따라갈게. 교수님이랑.”

 

유연은 그리 말하며 예준까지 밖으로 떠나보냈고, 시끌벅적하던 바베큐장은 금세 휑한 기운이 감돌았다. 남겨진 것은 아무렇게나 널브러진 음료 병들과 자욱하게 떠다니는 연기들이었다. 자리에서 일어나 음료 병들을 정리하며, 유연이 입을 열었다.

교수님, 죄송해요. 많이 소란스럽죠.”

“괜찮아요. 이런 분위기도 그렇게 나쁘지 않네요. 당신과 함께여서 그런 걸지도 모르겠지만.”

 

도와줄게요. 허묵은 유연의 옆으로 바싹 붙었다. 쿵쿵, 심장이 뛰는 소리가 허묵에게까지 전해졌는지, 곧 허묵이 싱긋 웃으며 유연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갑자기 심장이 왜 이렇게 빨리 뛰는 거죠? 유연은 놀리지 마세요! 새침하게 그리 말하며 그의 품에서 황급히 도망쳤다. 어디 가요, 유연 씨. 저녁엔 나랑 같이 있기로 했잖아요. 유연의 머릿속에, 오늘 아침에 있었던 일이 자동으로 재생되었다. 캐리어를 들고 집을 나선 직후. 집 앞에서 허묵과 함께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던 그 시간이었다.

오늘 하루에, 작은 조건을 하나 걸어도 될까요?”

“네? 무슨,”

“저녁 이후의 당신의 시간은 나에게 줘요.”

 

안 될까요?

그렇게 말하며 잡는 손을 유연은 뿌리칠 수 없었다. 게다가… 유연 역시 그 순간이 있었으면, 하는 마음에서 허묵을 이번 휴가에 부른 것이었으니까. 유연은 고개를 끄덕였고, 허묵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당신에게 보여주고 싶은 것이 있었는데. 둘만의 시간을 가질 수 있게 돼서 정말 기뻐요. 라는 달콤한 말은 덤이었다.

 

교수님이 보여주고 싶은 것이 무엇일까?

그 생각 하나로, 오늘 하루를 버텨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유연은 허묵의 그 말을 내리 곱씹고 있었다. 두 사람은 서로 짜지 않았음에도 함께 발걸음을 바닷가로 옮기고 있었다. 아직 비수기인지라,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았다. 느지막이 해가 지고 어둠이 깔린 바닷가는 어쩐지 낭만적인 느낌을 주기에 충분했다. 곳곳에서 빛나는 주황빛의 스파클라가 유연의 시선을 끌었다.

 

“불꽃놀이 하고 싶어요?”

“네, 오랜만에 보니까 하고 싶어졌어요. 어릴 때 생각도 나고요.”

 

허묵은 유연의 그 말 한마디를 곧이곧대로 듣고 근처 상점에서 스파클라 두 개를 사서 하나를 유연에게 건넸다. 신나게 받아든 유연을 보며, 허묵은 오래 전 그 시절의 유연을 마주한 기분을 경험했다. 내가 당신을 만나기 전의 당신은, 여전히 빛을 가진 사람이었구나. 그것은 허묵의 마음속에 커다란 울림을 주었다.

 

두 사람이 하나씩 들고 있는 스파클라에 불이 붙었고, 불은 탁탁 튀겨져 나가며 빛을 냈고 모래사장에 닿은 빛은 비로소 빛을 잃었다. 유연은 정말 어린 소녀처럼, 그것을 보며 연신 와아, 하는 소리를 냈고, 허묵은 제 손에 들린 스파클라는 이미 안중에도 없는 듯 유연의 그러한 낯빛을 그저 바라보았다. 그리고 유연은 그 시선을 알아채지 못할 리가 없었다.

 

“어허, 교수님! 불꽃에 집중해야죠! 사온 보람이 없잖아요.”

“하지만 내 눈엔 당신이 가장 빛나는걸요.”

 

어떻게도 이렇게나 낯간지러운 말을 아무렇지 않게 할 수 있는지!

두 뺨이 스파클라에 붙은 불꽃보다 더 붉게 달아오른 유연이 말을 더듬었다. 그, 그래도, 그건 불꽃놀이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고요! 그제야 허묵이 하하, 웃으며 말했다.

 

“그래요, 불꽃놀이에 대한 예의가 뭔지는 잘 모르겠지만… 당신이 원한다면, 여기에 집중해볼게요.”

허묵의 시선이 오랫동안 손에 들린 스파클라의 끝에 머물렀다. 불꽃은 꺼지지 않을 것처럼 파박파박 튀더니 조금씩, 조금씩 그 힘을 잃어가고 있었다. 유연은 아쉬워하며 스파클라를 이리저리 흔들었지만, 그에게 주어진 수명은 여기까지인 듯, 완전히 꺼지며 까만 심지를 드러냈다. 유연은 아쉬운 듯 다 꺼진 스파클라 막대를 힘없이 흔들었다.

 

“그래도 오랜만에 해보니 재밌었어요.”

“다행이네요. 당신은 아직도 어린아이 같은 모습이 있군요.”

 

바닷바람에 흐트러진 유연의 머리칼을 매만지며, 허묵의 시선은 하늘을 향했다. 이 정도면 충분할 것이리라. 이내 잠시 말이 없어진 허묵을 한 번 바라본 유연은 그의 시선을 따라 함께 하늘을 보았다. 그 끝엔 불규칙적으로 빛나는 별들이 빼곡한 밤하늘이 있었다.

 

“우와….”

 

감탄사가 나오지 않을 수 없는 풍경이었다. 옆에서 허묵이 그녀의 한쪽 팔을 들며 말했다. 손가락 들어 봐요. 유연은 검지 하나를 들어 하늘을 향했다. 허묵이 그녀의 팔을 잡고 이리저리 하늘을 향해 선을 잇기 시작했다. 미세한 바람이 팔 주변을 스치는 것이 온 피부로 느껴졌다.

 

“저게 북두칠성이에요.”

 

처음이었다. 북두칠성은 사계 어느 때나 볼 수 있는 별이라고 했는데, 이제껏 연모시에서 볼 수 없는 별자리였다. 도심의 밤은 낮보다 환하다는 말이 있다. 그만큼 별을 보기란 어려운 일이었다. 허묵은 그런 유연에게 선물해주고 싶었다. 평소엔 쉬이 볼 수 없는, 특별한 풍경.

 

“교수님, 별도 잘 알고 있나 봐요.”

“그렇게 잘 알고 있는 건 아니에요. 아무래도 뇌과학 분야에 더 집중하다보니.”

 

하지만, 그 어떤 별보다도 내 옆에 있는 사람이 더 빛나고 있다는 건 잘 알겠네요.

 

정말이지 못하는 소리가 없어!

아무 예고 없이 치고 들어오는 허묵의 말에, 놀란 유연이 그의 가슴팍을 약하게 쳤다. 허묵은 그 손길까지 좋은 듯 다정하게 웃을 뿐이었다. 그 다정함이 가진 따스함은 여름밤이 가진 온도와 잘 어우러져 있었다. 유연의 손가락이 허공에서 움직였다.

 

“이건 무슨 별이에요?”

“이렇게… 이으면 쌍둥이자리가 돼요. 자, 보여요?”

“어? 정말요!”

 

인터넷 속 별자리 운세로만 보던 그 별자리를 제 눈으로 확인하니 유연의 두 눈이 크게 뜨였다. 제자리에서 방방 뛰고 있다는 것도 그가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허묵은 잠시 유연과 꼭 붙어있는 몸을 떼어 가방에 담아 둔 카메라를 꺼내들었다. 별을 찍기에 턱없이 부족해 보이는 폴라로이드 카메라였다. 찰칵, 하는 소리와 함께 하늘에 집중되어 있던 유연의 시선이 허묵을 향해 돌아갔다. 허묵의 얼굴 대신 나타난 카메라 렌즈에, 유연의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으아, 뭘 찍으신 거예요!”

“응? 당신이 너무 귀여워서, 사진 속에 담아두고 싶었어요.”

“다시 찍어요! 너무 무방비 상태였잖아요.”

“글쎄요. 이쪽이 내 눈에는 별보다 더 반짝이는데. 사진에도 더 잘 찍히고.”

“교수님!”

 

새하얀 필름이 점차 선명해지며 피사체가 담겼다. 한 손을 들고 하늘을 응시하고 있는 유연의 모습이 프레임에 담겼다. 남자의 손에 들린 필름을 뺏으려 안간힘을 쓰는 여자와, 그것을 뺏기지 않으려 팔을 높이 들고 휘젓는 남자. 파도소리와 그들이 투닥거리는 소리, 그것이 세상의 전부였다. 적어도, 두 사람에게, 이 순간만큼은.

 

“어때요? 내게 시간을 맡긴 기분은?”

“말해 뭐 해요.”

 

최고였어요.

허묵은 언제나 유연에게 색다른 무언가를 선물했다. 허묵이 그녀에게 줄 수 있는 최선이었다. 유연으로 인해, 그는 색(色)을 볼 수 있게 되었고, 이 세상이 얼마나 다채로운지를 알게 되었으니까. 그것을 보답하는 하나의 과정이었다. 허묵은 언제까지고 그녀의 옆에서, 그가 그녀로 인해 얻은 모든 것들에 대해 보답하며 살아갈 것이라 다짐했다. 모래사장에 앉아 맞잡은 두 손은 온화했다. 바다가 머금은 습기는 그들에게 어떠한 애로사항도 되지 않았다. 어느새 별들의 중심엔 달이 자리하고 있었다.

 

“다행이에요. 당신이 마음에 들어 해서.”

 

그녀의 손에 제 손가락을 끼우며, 그가 지그시 미소 지었다. 깍지를 낀 이 손은 절대 놓지 않을 것이라고, 허묵은 그렇게 생각했다. 그녀 역시, 나와 같은 마음이길 바라며. 고개를 젖히고 하늘을 바라보며, 허묵은 속으로 조용히 읊조렸다. 저 이름 없는 별에는, ‘우리’라는 이름을 새겨 넣고 싶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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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락X유연] 여름연주

W. 벼르

 

합숙이요? 갑자기 무슨 합숙이요?”

“팀워크를 다지려면 합숙이 최고라잖아요. 어때요?”

 

초롱초롱한 눈으로 바라보는 기락의 제안을 거절하기도, 며칠씩이나 함게 보내자는데 덥썩 수락하기도 어려웠다. 유연은 우선 기락의 눈을 피했다.

 

“그래도... 어떻게 그래요.”

“아는 분 별장이 있는데, 아마 지금쯤이면 밤에 별도 무지 예쁠걸. 원래 창작이 막힐 때는 아무 방해도 없는 곳으로 도망쳐야 하는 거예요, 허니칩 씨. 같이 가요, 응?”

 

 

 

 

유연과 기락은 자선공연을 앞두고 있었다. 어린이를 위해 활동하는 가장 큰 비영리 단체에서 공연을 부탁하는 연락이 왔다. 기락은 제안을 받자마자 뛸 듯이 기뻐했고, 매니저도 기락의 대외적 이미지를 생각해서도, 그 단체의 규모를 생각해서도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그러나 한 가지 난관이 있었다. 기락과 합이 잘 맞으면서 아이들도 좋아할만한 아티스트를 찾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그때 임 실장이 유연과 공연을 함께하면 어떻겠냐고 제안했던 것이다.

 

“피디님, 피아노 칠 줄 알지 않으셨어요?”

“아, 그냥... 어릴 때요.”

“저번에 방송 때 반주자 늦어서 대신 치는 거 봤는데? 악보 읽는 거 어렵지 않잖아요.”

“그... 그렇긴 한데, 왜요?”

“이번에 기락이가 아이들 대상으로 공연하게 됐는데, 유연 씨가 도와주면 안 될까요? 아티스트 찾기가 영 쉽지 않네. 기락이가 평소에 연예인 동료들이랑 자주 어울리는 것도 아니고 해서. 친근한 모습을 보여줘야 하는데 둘이 어색하면 안 되거든요.”

 

청산유수같이 설득하는 매니저에게 절반, 갑자기 등장해서 ‘난 완전 대찬성!’이라고 외치는 기락에게 절반씩 설득당한 유연이었다. 사실상 수락만 했다 뿐이지 실질적으로 한 일도 많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여름이면 여름이라서, 겨울이면 겨울이라서, 계절마다 이유를 다르게 붙여 새로이 바쁜 방송 제작사였다. 두 사람이 시간을 맞추어 연습을 하기는 커녕 어떤 곡을 연주하자는 이야기조차 나누지 않았다. 아이들이 좋아하는 동요를 위주로 선곡하자는 뻔한 아이디어 회의 이후로 기락은 기락대로, 유연은 유연대로 바빠 아무런 진척이 없었다. 그러던 중 기락이 갑작스럽게 유연을 불러내 합숙을 제안한 것이다.

“허니칩 씨, 지금 빙수 맛집 특집 촬영하는 거 끝나면 편집에선 잠시 손 떼도 되죠?”

“그야 그렇지만...”

“잘 됐네! 나도 이번 여름 신곡 뮤직비디오 촬영 끝나면 잠깐 일정 비거든요. 녹음은 이미 다 되어있고! 다녀와요, 응?”

 

사실 편집에 손댈 것이 없어도 꼭 자리를 지키며 작업을 지켜보는 유연이었지만, 계속되는 기락의 설득에 흔들리는 건 사실이었다.

 

“알았어요... 그럼 회사 사람들한테 이야기는 해볼게요.”

“아싸! 꼭이에요, 허니칩 씨! 말만 그렇게 하는 거 아니죠?!”

“응, 내일 출근해서 이야기해 볼게요.”

 

 

 

다음날, 다른 회사 직원들이 거절했으면 좋겠다는 마음을 절반쯤 안고, 유연은 눈치를 보며 말을 꺼냈다. 자신이 길지는 않지만 짧지도 않은 휴가를 가면 어떨 것 같냐고. 직원들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당연히 다녀오라고, 다녀와야만 한다고 등을 떠밀었다. 유연은 조금 섭섭하고 많이 들떴다. 사실 불가능할 것이라고 여겼던 ‘합숙’이 현실이 될 것 같아서.

 

 

 

 

‘합숙’을 하겠다고 정해둔 장소에 도착했을 때는 벌써 오후 세 시였다. 아침과 점심을 뭉뚱그려 대충 해결한 두 사람은 식사부터 제대로 하자는 데에 암묵적으로 동의했다. 유연은 가스레인지 앞에 서서 전에 없게 초조한 모습이었다. 첫끼는 자신이 대접하고 싶다며 요리를 하겠다고 주장한 유연이었지만, 막상 기락 앞에서 요리를 하려니 망치면 어떡하나 걱정이 앞서는 유연이었다.

 

“레시피 찾아봤으니까 걱정 없다면서 큰소리치던 우리 허니칩 씨는 어디 있죠?”

“그...그게! 새로운 장소에서 요리하는 건 용기가 필요한 일이라구요.”

“아하하, 장난이야. 당연하죠. 식기도 다르고 조리기구도 달라서 허니칩 씨가 원래 요리하던 대로 똑같이 해도 잘 안 될 거예요. 나는... 다 태운 밥도 잘 먹을 자신 있으니까 걱정하지 마요.”

“진짜요?”

“그럼~ 지금 무지 배고프거든.”

“시..시장이 반찬이죠! 그 말 무르기 없기예요!”

 

다시금 자신감을 되찾은 유연은 앞치마를 꼬옥 묶고, 기락은 분주하게 식재료를 정리하고 씻어 유연에게 건네주었다. 능숙한 요리사가 제대로 맛을 낸 요리가 아닌 이상 그 맛을 좌우하는 건 요리의 완성도보다는 함께 있는 사람인 법이다. 우여곡절 끝에 지은 밥과 반찬은 비주얼은 그냥 그렇지만 맛만은 있었다고 두 사람 모두 동의했다.

 

식사 후에는 간단하게 회의를 하기로 했다. 첫날부터 바로 편곡 작업에 들어갈 수도 없을 뿐더러, 두 사람에게 가장 큰 문제는 선곡 자체가 덜 되어 있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기락 씨! 사실 나는~ ‘섬집 아기’ 좋아해요!”

“나도 그 노래 완전 좋아해요! 그런데 그건... 밝은 분위기에서 부르기엔 좀 슬프지 않아요?”

“그건 그래요. 사실... 난 어릴 때 슬픈 노래를 좋아했거든요!”

“정말? 허니칩 씨 지금이랑은 많이 달랐나봐요.”

“그건 모르겠지만... 이별이라는 노래를 피아노 콩쿨 때 연주하고 싶었는데 선생님이 그 곡은 ‘아이답지’ 못하다면서 못 하게 하신 거 있죠.”

“선생님이 너무했네!”

“그쵸! 그래서 열정이 좀 식었었어요. 사실 그 사건이 없었다면 피아니스트가 됐을지도 모른다구요!”

“아하하, 피아니스트 허니칩 씨도 멋졌겠지만, 난 지금도 충분히 좋아요!”

 

다른 곳으로 종종 새기도 했지만 두 사람의 논의는 계속되었고, 첫 곡만을 정하지 못한 채로 연주할 곡 리스트를 완성했다.

 

 

후련한 마음으로 기락과 유연은 산책에 나섰다. 펜션을 빙 둘러 걷다가 적당한 평지를 찾아 돗자리를 깔고, 두 사람은 잔디밭에 나란히 누웠다. 봄이나 가을보다는 여름이나 겨울에 별이 쏟아질 듯 많은 법이다.

 

“별이 진짜 예쁘네요.”

“그러게요. 허니칩 씨 같다.”

“아닌데요? 완전 기락 씨 같은데요? 우리 기락 씨 우주 대스타잖아요.”

“흐음...나는 여러 사람의 별이지만, 내 눈에 가장 빛나는, 그리고 유일하게 빛나는 별은 당신이에요.”

“무슨.... 그렇게 말하면, 나 진짜 오해한다구요.”

 

기락은 피식 웃곤 아무 말이 없었다. 마음을 전할 적절한 때가 있겠거니, 생각했다. 그게 지금은 아니라고도 생각했다. 지금은 그저 함께 있는 평화로운 순간을 누리고 싶었다. 감정은 좋은 쪽으로 터지건 나쁜 쪽으로 터지건 격해진다는 점에서는 같다. 따라서 유연의 긍정적 대답도 부정적 대답도 지금으로서는 나쁜 대답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유연 역시 민망했는지 잠시 말을 줄였다. 그 침묵을 잠시 응시하다 기락이 말을 꺼냈다.

 

“우리 오늘의 추억을 간직하기 위해서! 맨 첫 곡을 ‘작은별’로 할래요?”

“반짝반짝 작은 별이요? 괜찮긴 한데... 너무 흔하지 않아요?”

“음... 그러면 노래를 하나 더 섞으면 되지. 프로젝트 X 기억해요?”

“하아... 그 솜사탕이요? 나 그 이후로 솜사탕 못 먹잖아요.”

“하하, 맞아요. 그날의 추억도 간직하기 위해서! 예쁜 아기곰을 같이 연주해요.”

“예쁜 아기곰이요? 그.... ‘동그란 눈에~ 까만 작은 코,’ 하는 그 노래요?”

“응, 맞아요. 두 노래를 섞으면 예쁠 것 같지 않아요? 원래는 허니칩 씨가 피아노를 치고 내가 노래를 하기로 되어 있지만, 그 노래는 우리 같이 칠래요? 연탄곡으로!”

 

기락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한 유연에게 씨익 웃어보이고는, 일단 한 번 들어보라며 펜션으로 다시 뛰어들어갔다. 그리곤 잠시 숨을 고르고, 기락은 연주를 시작했다. 분명 익숙한 ‘반짝반짝 작은 별’의 선율로 시작한 노래가 어느새 다른 멜로디와 섞여 어우러지고 있었다. 유연은 그제서야 알아들었다는 듯이 피아노 의자 위에 털썩 앉았다. 기락은 슬쩍 왼쪽으로 비켜나면서도 연주를 멈추지 않았다.

 

두 손이 한 피아노 위에 포개졌다, 어긋났다 춤을 추며, 두 사람의 밤은 그렇게 깊어가고 있었다.

벼르 _ 기락X유연
초코_ 기락X유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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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락X유연]

W. 초코

 

35℃가 넘는 폭염이 기승을 부리는 7월 말. 유연이네 회사 직원들은 저마다 한 손에는 작은 선풍기 하나씩을 들고, 다른 한 손으로는 손부채질을 해가며 더위와 맞서고 있었다. 지난주부터 에어컨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리고, 작동이 잘 안 되는가 싶더니 고장이 나고 만 것이었다. 결국 출근과 동시에 수리기사를 불렀고, 에어컨이 고쳐지기 전까지는 잠시 쉬고 있자는 유연이의 말에 모두 동의를 하여 휴식 시간을 가지고 있었다.

 

"연예인도 참 힘든 직업이네요."

 

달그락거리며 에어컨 고치는 소리만 들려오던 중, 유영이의 목소리가 비집고 들어왔다. 그녀는 컴퓨터 화면을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는데, 아마 여러 기사를 훑어보고 있는 듯했다. 유영이가 무심코 툭 던진 말은 유연이의 관심을 끌기에 충분했고, 뭔데요? 라고 하며 다가간 그녀에게 보여준 기사는 주기락과 관련된 기사였다.

 

'주기락의 여름나기'라는 제목의 기사에는 바닷가에서 환하게 웃고 있는 주기락의 모습이 담긴 사진 한 장과, 즐거운 휴가를 보내고 있다는 내용이 적혀있었다.

 

"누가 봐도 여름휴가로 놀러 간 것 같은데, 놀다가도 기사에 쓰일 사진을 찍어줘야 하는 거잖아요. 그리고 이것도 보실래요?"

 

유영이는 휴대폰으로 SNS 접속했고, 검색창에 '주기락' 이라고 검색하니 그의 사진과 함께 글이 줄줄이 올라오고 있었다.

 

'헐 대박! 나 휴가 왔는데 여기 주기락 있다!

'

'와와와와아ㅏㅏㅏ아ㅏㅏ아아아 주기락! 사진 찍어달라고 부탁해서 같이 찍었다! 난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어. 선생님들 저 먼저 갑니다.'

 

'주기락 복근 본 사람? 저요. 눈 호강 제대로 하는 중. 여기가 어딘지 궁금하신 분들은 따로 연락해주세요. 알려드릴게요.'

 

그를 봤다는 글만 올라오면 다행이겠지만, 함께 찍은 사진을 올리는 사람들도 많았고, 더 나아가서는 어디인지 알려주겠다는 글도 꽤 많이 보였다. 급기야 '주기락 즉석 팬 사인회 중!'이라는 글이 있는 것으로 보아, 생각보다 많은 인파가 몰려갔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정말 하루라도 마음 편히 쉬지를 못하겠네요. 아, 맞아. 저희도 곧 휴가잖아요. 대표님은 뭐 하면서 보내실 생각이세요? 계획은 다 세워두셨어요?"

 

옆에서 유영이가 조잘대며 말을 걸어왔지만 유연이의 귀에는 하나도 들려오지 않았다. 며칠 전, 기락이의 휴가가 코앞으로 다가왔을 때 전화를 나눈 적이 있었는데, 그날 기락이는 아침부터 밤까지 꽉 찬 스케줄에서 벗어난다는 생각에 한껏 들떠있는 목소리였다. 그렇게 바라던 휴식을 취하게 되었건만, 지금 상황으로 보아서는 제대로 쉬고 있지도 못할 거라는 생각에, 휴대폰을 손에 꼭 쥐고 안부 문자를 보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이 되었던 것이다.

 

"저...대표님?"

 

"아, 네. 네, 그렇네요. 연예인들도 정말 힘들겠어요. 지금은 그만큼 우리도 곤란한 상황이지만요. 저, 기사님. 혹시 지금 에어컨 수리가 잘 되어가는지 알 수 있을까요?"

 

유영이의 질문에 동문서답으로 대답을 마친 유연이는 걱정을 떨치고자 수리기사에게 말을 걸었고, 돌아오는 건 한숨 섞인 대답이었다.

 

"이거 어쩌죠? 살펴봤는데 내부에 있는 기계장치 고장인 것 같네요. 못 고치는 건 아닌데, 부품이 본사에서 오기까지는 시간이 좀 걸리고, 하필 휴가 기간까지 겹치는 바람에 수리를 마치려면 적어도 일주일 정도 걸릴 것 같은데요."

 

귀에 똑똑히 들려오는 일주일이라는 단어에 직원들은 하나같이 절망에 가득한 표정을 지었다. 유연이네 회사의 휴가 기간까지는 3일 정도가 남아있었고, 그 뜻은 35℃ 가 넘는 폭염 속에서 에어컨 없이 3일가량을 일해야 한다는 뜻이었다. 절망스러운 건 유연이 또한 마찬가지였다. 자신만 더위에 맞서야 하는 상황이었으면 어떻게든 버텨보겠지만, 직원들 모두가 힘들어할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 직원들의 반응을 살피던 유연이는 무언가 결심한 듯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수리기사가 돌아가고, 이제 어떻게 해야 하나, 선풍기만으로 버틸 수 있을까, 아이스박스라도 사서 열기를 식혀야 하는 건 아닌가 하며 머리를 맞대고 의논을 하던 직원들 틈으로 유연이가 들어와 손뼉을 치며 주의를 환기시켰다.

 

"자, 날씨는 덥고, 에어컨은 고장 났고. 이런 상황에서 일하기에는 어려움이 있다고 판단해서 제가 나름 고민을 한 끝에 결정을 내리게 되었습니다. 바로...! 휴가 기간을 오늘부터로 정하기로!"

 

유연이의 말에 직원들 모두 환호성을 지르다, 휴가가 3일 앞당겨진다는 건 휴가가 끝나는 기간도 2일 앞당겨지는 건지에 대해 의문을 제기했다.

 

"아니요. 처음에는 그러는 게 맞는 것 같았는데, 생각해보니까 저마다 휴가 계획을 다 세워놓으셨을 테고, 그 계획에 차질이 생기면 모두 곤란해질 테니까 그냥 휴가 기간을 3일 더 늘리는 것으로 정했습니다. 휴가비는 오늘 안으로 입금해드릴게요. 저희는 휴가가 끝나고 다시 보도록 하겠습니다. 모두 푹 쉬다가 오세요."

 

직원들은 일제히 '대표님 만세!'를 외치며 가방을 쌌고, 하나둘씩 휴가를 즐기러 가기 시작했다. 유연이네 회사도 여름휴가를 맞이하게 된 것이다.

 

 

 

직원들이 전부 떠나고도 회사에 남아서 간단한 서류들을 처리하고, 모두에게 휴가비를 입금하고 나서야 한숨 돌릴 수 있게 된 유연이는 A4용지 한 장을 가져다 놓고 휴가 계획을 세우기 시작했다. 며칠 전 개봉한 영화 중, 보고 싶은 영화가 있었는데 도통 시간이 나지 않아서 보지 못한 영화가 있었다. 그 영화도 보러 가고, 거리가 조금 떨어져 있는 동네에 대형 백화점이 생겼다고 했으니 시간을 내서 한 번 다녀오고. 그렇게 2일간은 그동안 시간이 없어서 가보지 못했던 곳들을 중점으로 다녀오는 것을 목표로 했다. 그렇게 이곳저곳을 다녀오고 하루 정도는 푹 쉰 후에, 휴가가 시작한 지 3일째 되는 날 본격적인 휴가 기간에 돌입하게 되면, 미리 계획해둔 바닷가로 피서를 떠나는 것이다.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종이에 바다와 모래사장, 파라솔, 그 밑에 있을 자신의 모습을 그려나가던 유연이의 손이 멈췄다. 문득 휴가를 가서도 인파에 파묻혀 있을 기락이의 모습이 떠올랐다. 걱정되는 마음을 담아 잘 쉬고 있냐고 물어보면, 자신은 즐겁게 지내고 있다고 안심시키겠지. 서로의 휴가 기간을 공유하였으니 연락의 마무리는 자신에게 즐거운 휴가 보내기를 바란다고 말할 기락이의 음성이 귓가에 생생하게 들려오는 것 같았다.

 

누구는 제대로 즐기지도 못하고, 누구는 푹 쉬다 오는 것은 맞지 않는다고 생각한 유연이는 저장된 기락이의 번호를 찾아서 통화 버튼을 눌렀다. 곧이어 통화 연결음이 들려왔고, 가만히 벨 소리를 듣고 있다가 옆에 사람이 있다면 전화받기가 곤란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 황급히 전화를 끊으려 했다. 그런 유연이의 행동을 저지한 건 기락이의 밝은 목소리였다.

 

- 허니칩 씨? 무슨 일이에요?'

 

유연이의 걱정과는 달리 전화를 받는 기락이의 주위는 조용했고,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전화를 이어나갈 수 있었다.

 

"별 일은 없고, 그냥 휴가 잘 보내고 있나 해서요."

 

- 난 또 뭐라고. 전화받으면서 괜히 긴장한 거 알아요? 난 잘 보내고 있어요. 그거 알아요? 여기 근처에 작은 수족관이 하나 있더라고요. 규모는 작은데, 희귀한 생물들이 정말 많았어요. 그리고 지금 바다가 보이는 호텔에 묵고 있는데 전망도 엄청 좋고, 무엇보다 조식이 맛있어요! 다음에 저랑 같이 오지 않을래요?

 

유연이가 예상했던 것처럼 기락이는 기자들에게 사진을 찍히는 일, 수많은 팬과 사진을 찍은 일, 즉석에서 팬 사인회를 개최한 일들은 모두 숨기고 그저 즐거운 이야기만을 그녀에게 전달하고 있었다. 그냥 이대로 모르는 척 넘어가야 하나 고민한 유연이는 결국 솔직하게 자신의 진심을 털어놓았다.

 

"그...사실 기사...봤어요. SNS도 보고. 휴가 도중에 기사에 넣을 사진 찍히는 건 다른 연예인분들도 마찬가지겠지만, 즉석에서 사인회를 개최할 정도면 많은 팬이 몰려간 거 아니에요? 정말 푹 쉬고 있는 거 맞아요?"

 

- 음...하하, 역시 허니칩 씨는 속일 수가 없네요. 사실 가끔 이게 쉬는 게 맞는 건가 싶은 생각도 들어요. 하지만 익숙하니까요. 괜찮아요. 정말로!

 

이번에도 예상이 적중했다. 예상대로 자신은 괜찮다며 덤덤하게 다독여왔지만, 덤덤한 말투가 어쩐지 마음 편히 쉴 기회를 포기하는 것으로 들려와 이렇게 가만히 있을 수만은 없었다.

 

"기락 씨, 우리가 함께 여름휴가를 즐길 방법을 생각해봤거든요. 들어볼래요?"

 

 

 

그로부터 2일이라는 시간이 지났고, 현재 유연이는 양손에 가방 하나씩을 손에 든 채로 낡은 기차 플랫폼 앞에 나와 있는 중이었다. 지금 시간은 오후 12시 53분. 기락이가 모든 계획을 무사히 성공적으로 마쳤다면 7분 후, 그녀의 앞으로 와야 했다.

 

전화 통화 당시, 유연이가 말한 계획은 이러했다. 첫째, 기자들에게 기존에 정해두었던, 휴가를 마치고 돌아가는 날짜를 자연스럽게 말하고 다니기. 둘째, 기자들과 팬들의 눈을 피해 매니저 차에 올라타기. 셋째, 마지막 날까지 호텔에 머물렀던 것처럼 연기하기.

 

당시에는 잘 해내 보이겠다는 기락이의 당당한 말을 듣고 그라면 잘 해낼 거라고 굳게 믿었으나, 시간이 다가올수록 초조해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더군다나 그날 통화를 마친 이후로 연락이 한 통도 안 온 점이 유연이의 불안감을 더욱 크게 만들었다.

 

그녀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시간은 자꾸만 흘러갔고, 어느덧 시계는 1시를 가리켰다. 유연이는 목을 길게 뺀 채로 길모퉁이를 바라보았고, 이윽고 멀리서 승용차 한 대가 다가오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지금은 그 누구의 왕래도 없는 허름한 기차 플랫폼이라고는 하나, 차에서 기락이가 내릴 때까지 방심할 수 없었다. 어쩌면 그냥 지나가는 길일 수도 있으니 좀 더 지켜보기로 했고, 다행히 승용차는 유연이의 앞에서 멈춰 섰다.

 

"허니칩 씨!"

 

승용차의 문을 열고 나타난 건 그토록 기다렸던 주기락이었다. 유연이는 기쁨을 감추지 못하고 기락이의 이름을 부르며 그에게로 다가갔다.

 

"미안해요. 많이 기다렸어요?"

 

"아니요. 딱 시간 맞춰서 잘 왔어요. 모두 무사히 성공했나 봐요?"

 

"음...중간에 일이 틀어질 뻔하기는 했는데 잘 대처해서 이렇게 온 거예요. 자세한 이야기는 가면서 해요. 형, 데려다줘서 고마워요. 뒷일은 잘 부탁할게요."

 

기락이는 운전석 창문을 두드려서 창문을 내리게 하고, 매니저에게 감사 인사를 전했다. 유연이도 그를 따라 고마운 마음을 담아 고개를 숙여서 인사를 했다. 매니저는 기락이에게 항상 조심하라는 말과 무슨 일 있으면 연락하라는 말을 전한 후, 플랫폼에서 멀어져 갔다.

 

그제야 유연이를 제대로 바라볼 수 있게 된 기락이는 그녀의 손에 들려있는 가방들을 보고 황급히 뺏어 들었다.

 

"아까부터 궁금했는데, 이 가방에 들어 있는 것들은 다 뭐예요? 허니칩 씨가 준비한 거예요?"

 

"당연하죠. 그렇다고 거창한 걸 준비하지는 않았고, 그냥 집에 있던 용품 몇 개 담았어요. 어제 대형마트를 다녀온 김에 이것저것 사기도 하고. 아,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잖아요. 일이 틀어질 뻔했다면서요? 무슨 일이 있었던 거예요?"

 

"처음에 기자들한테 돌아가는 정보를 흘리는 건 어렵지 않았어요. 그들이 보는 앞에서 일부러 아, 내일 돌아가야 해서 아쉽다. 하루만 더 있었으면 좋겠다. 이렇게 말하고 다녔거든요. 덕분에 모든 기자가 안심한 것 같더라고요. 아니다, 딱 한 사람 제외하고. 그 기자는 예전부터 연예계 사람들에게 촉 좋은 기자라고 말이 많았거든요. 차에 타려고 주차장에 내려오니까 그 기자가 와 있는 거 있죠. 대충 둘러대고 나왔는데, 잘 모르겠어요. 통했을지 어떨지."

 

기락이는 고개를 한 번 으쓱거렸고, 간혹 고개를 끄덕이기도 하고, 미소를 짓기도 하고, 미간을 찌푸리기도 하며 그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유연이는 마지막 말에 우뚝 걸음을 멈추고, 심각한 표정으로 기락이를 바라보았다. 기락이는 자신의 옆에서 걸어가던 유연이가 보이지 않자 뒤를 돌아보았고, 걸음을 멈춘 그녀에게 왜 그러냐는 눈빛을 보냈다.

 

"아니, 잘 모른다니요? 그러다 안 좋은 기사라도 올라오면 어쩌려고요? 아니다. 벌써 올라왔을 수도 있겠네요. 한 번 확인해볼까요?"

 

횡설수설하며 휴대폰을 찾으려 주머니를 뒤적이는 유연이의 손을, 어느새 다가온 기락이가 조심스럽게 그녀의 손을 붙잡았다.

 

"걱정하지 말아요. 나 주기락이에요. 그럴싸한 변명도 생각하지 않고 그냥 왔을 것 같아요? 나름대로 생각 완벽하게 해놓은 상태니까 안심해도 돼요. 자, 이제 허니칩 씨가 나를 목적지까지 인도해 줄 시간이에요. 안내자님, 목적지까지는 오래 걸리나요?"

 

천연덕스럽게 웃으며 장난을 걸어오는 그의 모습에, 짐짓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던 유연이의 표정도 점차 풀어지며 이윽고 피식 웃고 말았다. 유연이는 길을 따라서 조금만 걸어 올라가면 된다고 말했으나, 걸어갈수록 길이라고 부를 수 있을 만한 길은 사라지고, 나뭇잎이 우거진 산길만 보이기 시작했다.

회사 에어컨이 고장 난 이야기, 내일부터 친구와 함께 떠나기로 한 휴가, 호텔에 묵으면서 생겼던 기락이의 에피소드, 휴가 끝나면 기다리고 있을 서로의 일 이야기 등을 나누며 걷다 보니 어느덧 목적지 근처에 다다랐다. 유연이는 손으로 황급히 한 손으로 기락이의 눈을 가리고, 다른 한 손으로 그의 손을 꼭 잡고 천천히 앞으로 이끌어주었다.

 

"뭔데요? 눈을 가리고 가야 하는 이유라도 있는 거예요?"

 

"네. 제가 처음 이곳에 왔을 때 느꼈던 기분을 기락 씨에게도 느끼게 해주고 싶거든요. 정말 조금만 걸어가면 돼요. 다섯 걸음, 네 걸음, 세 걸음, 두 걸음, 마지막 한 걸음. 이제 눈 떠도 괜찮아요."

 

유연이는 눈을 떠도 된다는 말과 동시에 가리고 있던 손을 치워 주었고, 기락이도 감고 있던 눈꺼풀을 서서히 들어 올렸다. 기락이의 눈에 들어온 모습은 울창한 나무가 빽빽하게 줄지어 서 있고, 나무 사이로는 햇빛이 비치고, 나무들 한가운데에는 나무로 지은 집 한 채가 놓여 있는 모습이었다. 집 앞에 가만히 서서 주위 소리에 귀를 기울이면 새가 지저귀는 소리, 매미 소리, 멀리서 흐르는 물소리가 들려왔고, 전혀 어울리지 않을 소리가 오케스트라의 연주처럼 조화를 이루고 있어, 듣는 사람에게 여유로움을 가져다주었다.

 

"어때요? 마음에 드는 숙소인가요? 나름 고심한 끝에 골라봤는데."

 

"엄청 마음에 들어요! 이런 곳은 어떻게 알게 된 거예요?"

 

"고등학교 때, 친구들이랑 놀러 온 적이 있거든요. 바닷가는 사람들이 너무 많이 몰릴 테고, 어디가 좋을지 고민하다가 이곳이 생각났어요. 숙소는 여기 한 곳뿐인지라 사람들의 오고 가지도 않고, 마음 편하게 놀 수 있는 곳. 일단 목적지까지 도착한 건 좋은데, 우리 뭐부터 해야 할까요?"

 

기락이에게 제대로 된 휴가를 선물해주고 싶다는 생각에 계획을 세운 건 좋았으나, 도착하고 나서 무엇을 할지에 대해서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다. 일단은 무사히 오는 것이 가장 중요했기에. 유연이의 물음에 함께 고민하던 기락이의 귓가에 작게 물소리가 들려왔다.

 

"아까 도착해서부터 궁금했는데, 작게 들려오는 물소리는 뭐예요? 근처에 물가라도 있는 거예요?"

 

"산하면? 계곡이죠! 걸어서 5분 정도 걸리는 곳에 계곡이 있어요. 예전에 왔을 때는 물이 꽤 맑았던 거로 기억하는데, 지금은 어떨지 모르겠네요. 짐 내려놓고, 편한 옷으로 갈아입은 다음에 가볼까요?"

 

그러기로 하고 숙소로 들어오니 내부에는 방이 총 3개가 있었다. 각각 방 하나씩을 잡고, 남은 방 하나에는 공용으로 사용 가능한 짐을 내려놓았다. 편한 옷으로 갈아입은 유연이는 거실로 나와서 냉장고를 열어 보았고, 그곳에는 유연이가 숙소 주인분들에게 미리 부탁해서 채워놓은 음식들이 들어있었다. 만족스럽다는 미소를 지은 그녀는 과일 칸에 들어 있는 수박을 꺼냈고, 마침 방에서 나와 그 모습을 본 기락이가 재빨리 다가가 수박을 건네받았다.

 

"이거 계곡에 가서 담가두려는 거죠? 이제 출발할까요?"

 

"좋아요. 아, 잠깐만요."

 

 문을 열고 나가려던 유연이는 방에 들어가서 작은 가방을 들고 나왔고, 그제야 계곡으로 향할 수 있었다. 계곡은 예전에 왔을 때와 달라진 게 없었다. 물은 여전히 맑아서 바닥이 다 비쳤고, 물의 높이도 발목까지 차오르는 정도로, 낮아지지도 높아지지도 않은 일정한 높이를 유지하고 있었다. 달라진 건 유연이 자신의 모습과 함께 놀러 온 사람. 추억을 회상하고 있을 때, 유연이의 머리 위로 공 하나가 스쳐 지나가서 물에 파동을 일으키며 떨어졌다. 놀라서 공이 날아온 곳을 바라보니 어느새 가방에서 비치발리볼을 꺼내서 불고는 이렇게 멀리 날아갈 줄을 몰랐다는 듯 머쓱한 표정을 짓고 있는 기락이가 보였다.

 

"허니칩 씨가 무엇을 가지고 왔는지 궁금했거든요. 불러도 대답이 없길래 마음대로 꺼내 봤어요. 혹시 불편했다면 미안해요."

 

"아니에요. 같이 가지고 놀기 위해서 가져온 건데요 뭐. 어어?! 공 떠내려가요!"

 

유연이의 말에 기락이는 공을 줍기 위해 물가로 뛰어갔고, 그 모습을 재미있다는 듯이 바라보던 유연이는 가지고 온 카메라 앵글에 그의 모습을 담다가 자신을 부르는 음성에 가까이 다가갔다.

 

두 사람은 가만히 물가에 걸터앉아서 물에 발을 담그기도 하고, 가지고 온 공을 주고받기도 하고, 물을 서로에게 튀기기도 하면서 물놀이를 즐겼다. 물놀이를 하다가 출출해지면 간식으로 먹기 위해 가져온 과일을 집어먹기도 했다.

 

 

그렇게 1시간가량 물놀이를 즐긴 그들은 서로에게 큰 수건을 둘러주고는 숙소로 향했다. 숙소로 돌아가서 간단하게 물로 몸을 헹궜고, 시간을 보니 3시 30분 정도가 되어 있었다. 저녁은 6시쯤에 먹기로 주인분에게 말해놓은 터라 2시간가량을 더 기다려야 했고, 기락이가 씻으러 들어간 사이에 이제 무엇을 하면서 시간을 보내야 할지 생각을 해보았다.

 

"기락 씨, 제가 이제 무엇을 하면 좋을지 고민을 해봤거든요. 그런데 마땅한 게 떠오르지 않더라고요. 예전에 친구들이랑 놀러 와서도 물놀이를 하고, 실내에서 보드게임을 하고, 주변 거리를 산책하고. 그게 전부였던 것 같아요. 그런데 실내에서 보드게임을 하기에는 이곳까지 온 보람이 없기도 하고, 아무래도 이곳이 산이라 산책을 하기에는 낮이 더 안전하니까..."

 

"산책을 하는 게 어떠냐고 물어보려고 하는 거죠? 난 허니칩 씨랑 하는 거면 뭐든 좋아요. 산책도, 보드게임도. 온종일 숙소에서만 있는 것도 허니칩 씨와 함께라면 무척 즐거울 거예요. 그러니까 너무 머리 아프게 고민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아까 계곡 가서 보니까 카메라 가지고 온 것 같은데, 산책하면서 서로 사진 찍어주기로 할까요? 같이 휴가를 보낸 증거는 남겨야 하니까요. 그리고 내가 뭘 챙겨왔는지 보여줄게요. 나도 허니칩 씨한테만 부담을 주기는 싫었거든요."

 

방에 들어간 기락이는 무언가를 꺼내서 등에 숨긴 후,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는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유연이에게 보여주었다. 기락이가 가지고 온 것은 다름이 아니라 셀카봉이었다. 안 그래도 카메라로 그를 찍고 있을 때, 불현듯 셀카봉을 챙기지 않은 것을 후회하고 있었는데 마침 그가 챙겨와 준 것이었다. 유연이는 그를 향해 엄지손가락을 치켜들었고, 기락이는 어서 나가자며 그녀를 이끌었다.


 

숙소 옆에 나 있는 작은 산책로를 따라 너무 느리지도, 너무 빠르지도 않은 속도로 걸으며 도란도란 대화를 나눴다. 주제는 다양했다. 본인들이 현재 무엇을 하면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는지에 대한 일상 이야기부터, 요즘 무엇이 가장 먹고 싶은지, 안 해본 것 중에 가장 해보고 싶은 것은 무엇인지, 휴가가 끝나면 무엇을 할 생각인지에 관해서 이야기를 나눴다. 그뿐만이 아니라 그들 주위 사람들의 여름휴가 계획에 대하여 얘기를 나누기도 하고, 옆집에서 기르고 있는 강아지가 이번에 새끼를 몇 마리 나았다더라 하는 시시콜콜한 이야기까지 나누었다.

 

그러다 주변에 예쁜 꽃이나 유독 울창해 보이는 나무, 처음 보는 식물을 발견하면 서로 사진을 찍어주거나 셀카봉을 이용해서 함께 사진을 찍곤 했다.

 

유연이는 산책하는 도중에도 이런 것밖에 해주지 못해서 미안하다고 말했으나, 기락이는 정말 무엇을 하든 상관없었다. 오히려 그동안 손 하나 까딱 안 하고 푹 쉬고 싶다는 생각을 자주 해왔기에, 바다에서 보드를 타거나, 산에서 암벽등반을 하는 등 몸을 쓰는 활동을 하는 것보다는 간단히 산책을 하며 여유를 즐기는 것이 더욱 마음에 들었다.


 

산책을 마치고 숙소로 돌아오니 어느새 주인분이 왔다 가셨는지 바비큐 그릴에 불이 피워져 있었다. 이제 막 불을 피우셨는지 불은 이제 겨우 타오르고 있었고, 유연이와 기락이는 부리나케 숙소 안으로 들어가서 고기와 곁들여 먹을 상추, 반찬을 하나둘씩 옮겨왔다.

 

"자, 고기 굽기의 달인 주기락 나갑니다! 내가 금방 맛있게 구워줄 테니까, 조금만 기다려요. 알겠죠?"

 

"네? 아니에요. 제가 구울게요. 기락 씨 쉬게 해주고 싶어서 계획한 일인 걸요. 기락 씨야말로 가만히 앉아서 기다려요."

 

서로 내가 굽겠다. 실랑이를 벌이던 끝에, 고기를 불판에 올리는 것은 기락이가, 적당한 때에 맞춰서 고기를 뒤집는 것은 유연이가, 마지막으로 고기를 자르는 것은 한 사람이 집게로 고기를 들어 올리고, 다른 한 사람이 가위로 자르기로 합의를 보았다.

 

"갑자기 친구들이랑 놀러 왔을 때가 생각나요. 그때는 고기를 제대로 구울 사람이 없어서 서로 네가 구워라 실랑이를 벌였거든요. 그래서 보다 못한 주인아저씨가 나오셔서 구워주신 거 있죠? 지금은 그때와 반대 상황이네요."

 

"그만큼 시간이 흘렀다는 뜻이겠죠. 그때의 허니칩 씨가 즐거워했듯이, 지금의 허니칩 씨도 지금 이 순간이 즐거웠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드는데, 어때요? 나랑 함께 온 것도 훗날 기억에 남을 것 같아요?"

 

"당연하죠. 평생 잊지 못할 거예요."

 

고기를 굽다 말고 팔짱을 낀 채로 유연이의 답변을 기다리고 있던 기락이는 유연이의 입에서 만족스러운 말이 나오자 미소를 짓고는 다시 고기를 구워나갔다. 어느 정도 접시에 고기가 수북하게 올라왔고, 이 정도면 배부르게 먹을 수 있을 거라는 판단이 들어 굽기를 중단하고 자리에 앉았다.

 

고기를 입에 넣은 순간, 입안에서 사르르 녹는다는 게 무엇인지 느낀 그들은 누가 빼앗을세라 고기를 한 점, 두 점 먹기 시작했다. 그냥 고기만 집어 먹기도 하고, 밥 위에 얹어 먹기도 하고, 상추에 싸 먹기도 하고, 상대방에게 쌈을 싸서 먹여 주기도 하며 즐거운 저녁 식사 시간을 보냈다.


 

저녁을 먹은 후, 식탁을 정리하고 있는 유연이는 기락이가 보이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안 보는 사이에 숙소로 들어갔나 싶었으나, 자신이 숙소 문이 바로 보이는 곳에 앉아 있었기에 들어갔으면 모르지 않았을 거라는 결론을 내리고 두리번거렸다. 그때, 계곡 방향에서 수박을 들고 오는 기락이의 모습이 보였다.

 

"밥을 먹었으면 후식을 먹는 건 당연한 거니까요. 잘라올 테니까 식탁 마저 치우고 있어 줄래요?"

 

"네, 그럴게요."

 

식탁 정리를 마무리 지을 때쯤에 기락이가 쟁반에다 썰어놓은 수박을 가지런히 놓아서 가지고 나왔다. 계곡물에 담가놨던 수박은 평소 냉장고에 넣어놨던 수박보다 훨씬 달고 맛있었다. 각자 수박 한 조각을 들고 가만히 앉아서 시원하게 불어오는 바람을 느끼고 있을 무렵, 유연이가 무언가 생각났다는 듯이 손뼉을 치며, 먹던 수박을 내려놓고 숙소 안으로 달려 들어갔다. 잠시 후, 숙소에서 나온 유연이의 손에 들린 물건은 기락이가 전혀 생각하지도 못했던 것이었다.

 

"허니칩 씨, 이건 뭐예요?"

 

"연이에요. 바닷가에서는 보통 저녁에 불꽃놀이를 하잖아요. 그런데 이곳은 산이라서 산불 위험이 있으니까 그러지는 못하고, 이 연들로 불꽃을 대신할 거예요. 연 두 개만 들어줄래요?"

 

유연이는 기락이에게 가지고 온 연들 중 2개를 건네주었고, 기락이는 연을 받아들었다. 그녀도 기락이의 옆자리에 앉아서 연 하나를 손에 들었고, 처음에는 잠잠하던 연들을 본 기락이가 그냥 이렇게 있으면 되는 거냐고 물어보려는 찰나, 바람이 불어와 땅에 붙어있던 연을 하늘로 천천히 떠오르게 만들어 주었다.

 

공중으로 떠오른 연들은 숲에 있는 나무들보다는 약간 짧은 길이의 연이었는데, 나중에 물어보니 혹시라도 높게 떠오른 연이 지나가는 비행기를 방해할 수 있기에 그것을 방지하고자 일부러 기존 연보다는 짧게 만들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모든 연들이 나무에 걸리는 것 없이 무사히 하늘로 떠올랐고, 유연이는 비어있는 손으로 휴대폰 플래시를 켜서 하늘을 잠깐 비추었다. 그 짧은 시간에 보인 건 마치 다양한 색의 별 같기도, 유연이의 말처럼 불꽃 같기도 한 연의 모습이었다.

 

"이런 생각은 누가 한 거예요?"

 

"친구들이랑 놀러 왔을 때, 친구 중에 한 명이 불꽃놀이를 못 해서 아쉽다는 말을 들었거든요. 그때는 당장 불꽃을 대체할 만한 무언가가 없어서 그냥 돌아왔는데, 짐을 챙기면서 그때 그 일이 생각났더라고요. 그래서 이번에는 아쉬움 없는 하루를 보내고 싶어서 가지고 와봤어요. 그래서 말인데, 오늘 어땠어요? 괜찮았어요?"

 

유연이는 걱정되는 마음으로 기락이를 바라보았고, 그녀의 흔들리는 눈동자와 떨리는 손에서 불안감을 읽은 그는 환한 미소를 보여주었다.

 

"응, 엄청 좋은 하루였어요. 이렇게 여유로웠던 하루는 살아생전 별로 없었던 것 같아요. 정말 손에 꼽을 정도거든요. 그래서 정말 좋았고, 소중한 하루를 만들어준 허니칩 씨한테 무척 고마워요. 다음에도 같이 이곳으로 휴가 오지 않을래요? 난 그러고 싶거든요."

 

기락이의 말에 유연이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고, 이내 그의 미소에 보답하듯 똑같이 환한 미소를 보여주었다.

 

"응, 그럴게요. 내년에도 꼭 같이 와요."

 

두 사람은 서로를 바라보며 웃어 주었고, 그들이 바라본 하늘에는 반짝거리는 자연의 별들과 연이 만들어 낸 인공의 별들이 한데 어우러지고 있었다.


 

그렇게 두 사람만의 첫 여름 휴가는 다음을 기약하며 성공적으로 막을 내렸다.

영화 _ 택언X유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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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택언X유연] 意中之人(의중지인)

W. 영화

 

“네? 그러니까 방금 뭐라고…….”

“못 들었습니까? 출장 간다고 했습니다.”

“……출장, 이요?”

“사전답사 안합니까? 어느 외딴 섬으로 갈 예정입니다만.”

어느 외딴 섬이라니……. 어쩐지 유연의 목소리가 떨리고 있는 것은 비단 착각은 아닐 것이다. 보고서 제출을 위해 방문한 화예의 대표실에서 방금 전, 무슨 얘길 들은 것인지 얼떨떨하기만 하다. 유연은 자신을 빤히 쳐다보고 있는 택언을 보고는 절망적인 표정을 지었다. 프로그램을 제작하기 위해선 출장도 마다하지 않는 직업이란 것은 일찍이 알고 있었다. 어렸을 적, 아버지를 따라 다양한 나라에서 조금씩이나마 생활을 해본 경험도 있었으니까. 출장이나 다른 나라로 여행을 간다거나 하는 것에 대해 크게 거부감은 없는 편이다.

하지만 그런 부분도 어떤 사람과 함께 하느냐에 따라 다르다. 좋아하는 사람과 함께 하는 여행이라면 어떤 것들을 해도 당연히 좋을 테고, 하물며 홀로 출장을 간다고 해도 일정이 끝난 시간에는 혼자만의 여유 있는 시간을 보낼 수 있을 테니 그건 그거대로 또 좋았을 것이다. 분명 그랬을 것이다. 게다가 다가오는 여름휴가를 위하여 언제부터 언제까지 휴가 일정을 잡을 것인지를 비롯하여 어디로 여행을 갈 것 인지까지 두근두근 설레는 마음으로 하루하루를 손꼽으며 지내왔다. 이 마저도 희망이 사라져버렸지만.

화려하게 핀 벚꽃이 꽃비를 내리고, 그 위로 푸르른 잎사귀를 밀어 올렸다. 온 몸을 감싸는 기분 좋은 바람은 조금씩 더위를 품기 시작했다. 조금씩 무더운 여름이 찾아오기 시작했고, 무거운 코트를 벗어 던지고 점점 가벼운 옷차림으로 변해가고 있던 계절이었다. 유연은 보고서를 손에 꼭 쥔 채 원망어린 눈으로 택언을 쳐다봤다.

“사전답사도 당연히 중요하죠. 어떤 곳으로 가서 어떤 앵글로 잡아서 촬영을 해야 할지 미리 정해둘 수 있으니까요.”

“그런데 뭘 그렇게 놀라고 있습니까? 이번 프로그램의 기획 의도는 색다른 여행지에서 전혀 접해보지 못했던 것들을 접하는 것이 목표 아닙니까?”

“……네. 하지만 이번 경비는 로케이션 촬영을 가는 것도 빠듯해서, 사전답사까지는 전혀 고려하지 않았던 부분이에요.”

유연은 울며 겨자 먹기로 목구멍까지 올라 찼던 말을 겨우 입 밖으로 내뱉었다. 다가오는 여름 휴가철을 맞이하여 새로운 프로그램을 기획했는데, 색다른 여행을 체험해보자는 방향으로 기획 단계를 잡아 나갔다. 여행지를 고르고 나니, 어떤 체험을 해볼 것인지에 대한 논의가 이뤄지면서 하나 둘씩 틀이 잡혀갔다. 하지만 한 가지 간과하고 있었던 부분이라면 당연히 비용부분이었다.

대형 프로덕션과는 달리 유연네 프로덕션이 아무리 화예의 투자를 받고 있다고 하더라도 로케이션 촬영에 대한 비용 부담이 제법 컸던 것은 사실이다. 그렇기에 택언에게 얘기도 제대로 꺼내지도 못하고 속으로만 끙끙 앓고 있었던 유연이었다. 프로그램이 방영이 되려면 최소 1년은 더 지나야 하니 이번 여름휴가를 빌미삼아 -다른 사람에게는 조금 미안하지만- 혼자서라도 사전답사를 다녀올 계획이었다. 여럿이서 다녀오는 것보다 혼자 다녀오는 것이 비용이 훨씬 덜 들어가기도 하니까.

“뭘 그런 것까지 다 걱정을 하고 그럽니까.”

“…….”

“당신이랑 나랑 둘이서만 다녀올 겁니다. 사전답사인 만큼 우르르 몰려 갈 필요는 없으니까요.”

“단둘이서요?”

불가항력의 상황이다. 유연이 가지 않겠다고 고집을 부릴 수 있는 상황도 아닐뿐더러, 로케이션 촬영의 경우에는 미리 촬영지로 방문하여 허락을 구하는 절차 또한 필요했기 때문에 택언의 말엔 절대적으로 거절할 수 없는 상황임은 틀림이 없다. 유연이 얼마나 힘을 줬는지 살짝 구겨진 종이에 흠칫 놀라며 구겨진 부분을 손으로 툭툭 털어 펴내며 보고서를 가방에 챙겨 넣었다.

“매번 이렇게 신경 써주셔서……감사합니다.”

“그럼, 가 봐요. 자세한 일정은 문자로 보낼 테니.”

유연은 울상이 된 채 대표실에서 나왔다. 나오는 길에 위겸 실장과 마주쳐 대표실에서 무슨 일 있었느냐는 물음에 유연은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으며 서둘러 엘리베이터에 몸을 실었다. 어쩌다가 이렇게까지 되었는지 그저 한숨만 나온다.

멋진 프로그램을 만들기 위해 자신만만하게 도전했지만, 현실의 벽은 너무나도 높았고 단단했다. 보이지 않는 커다란 벽에 가로막힌 유연은 좌절할 수밖에 없었다. 대형 프로덕션에 비해 비교적 직원도 몇 명되지 않는 작은 프로덕션이었기 때문에 프로그램을 제작하더라도 투자 받는 것이 꽤 어려웠다. 프로그램 기획 단계는 마무리 되었으나 투자를 받지 못해 제작되지 못하고 있는 프로그램들을 보면 속이 쓰라렸다.

캐스팅이며, 투자며. 이런 머리 아픈 일들의 연속이었다. 여러 곳으로 프로그램 제작을 위한 투자를 해달라는 기획서를 보냈었지만 답장이 돌아온 곳은 한 곳도 없었다. 화예의 답장에 모든 것들이 달려 있었기 때문에 답장이 올 때까지 얼마나 피가 말라갔는지 모른다. 크게 기대하지 않았던 화예로부터 투자를 해주겠다는 답변을 듣고 나서야 그동안의 일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더랬다. 서로 얼싸안고 얼마나 펑펑 울었던지.

버스 안에서 빠르게 지나가는 풍경들을 보고 있으니 당시의 기억들이 드문드문 떠오른다. 아무런 보잘 것 없는 자신들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그들의 신뢰를 얻기 위해 끊임없는 노력을 하는 것이 전부였다. 덕분에 소형 프로덕션은 번듯한 중형 프로덕션으로 무사히 성장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이 대표와 만나기 전, 소문에 의하면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나올 것 같은, 냉 미남이라던데. 요즘 들어 이 대표 조금 이상하지 않아요?”

“음, 확실히 첫 인상은 그랬던 것 같아요. 기획서 들고 오라는데, 가는 길에 너무 떨려서 청심환을 두 개나 먹고 간 거 있죠.”

“맞아요. 최근 들어서 부쩍 유연 대표에게 연락하는 일이 많아졌죠. 두 사람, 무슨 일 있었던 거 아니에요?”

“일은 무슨. 기획서가 까이지는 않을까 항상 노심초사하고 있는 걸요.”

“근데 이 대표가 유연씨 쳐다보는 걸 보니 보통 눈빛이 아니던데.”

옆에 있던 예준이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두 사람 뭔가 있는 것 같다니까. 유연은 어색하게 웃으며 예준과 고은을 번갈아서 쳐다봤다. 화예의 투자를 받으며 프로그램을 제작한 것도 벌써 3년이 지났다. 실제로도 택언과의 관계가 가까워졌다면 가까워졌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멀다고 하면 또 먼 관계일 수도 있는. 조금은 애매한 관계를 3년 동안 유지해왔다. 투자를 해주는 쪽과 받는 쪽이었기 때문에 좀 더 정중하게 행동하고 그런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맞다.

하지만 불과 2개월 전, 여느 날과 다를 바 없이 한 달에 한 번씩 올리는 정기 보고서를 올리기 위해 화예에 들렸었다. 화예와 함께 한지 2년이 막 지났기 때문에 이택언 대표가 조금 편해진 것도 사실이었다. 처음 미팅을 가졌을 때에 비하면 훨씬 편해진 표정과 행동이 아주 자연스럽게 나왔다. 조금은 장난을 칠 줄도 알게 되었고, 딱딱하게만 들렸던 말들이 어쩐지 그 말 속에 배려를 듬뿍 담아낸 말들이란 것을 알고 나니 대하기가 한결 편해졌다.

“대표님은 연애할 생각 없으세요?”

“연애는 무슨 연애입니까.”

“이렇게 능력 좋은 사람인데 솔로로 지내기엔 아깝잖아요.”

유연은 입 밖으로 말을 내뱉은 후에 곧바로 후회했다. 너무 많이 친해져서 이렇게 된 것이라며 스스로를 책망했다. 그래도 한 기업의 대표 직책에 있는 사람이니 당연히 바쁠 텐데 연애 할 시간이 있을까. 조금만 생각해봐도 답이 나오는 질문이었다. 말실수를 한 것 같아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그를 쳐다보는 자신과 달리 그는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좋아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

왜 연애를 하지 않는지, 솔로로 지내기에는 아깝지 않느냐는 물음에 대한 답인지는 모른다. 한 박자 늦게 나온 대답은 금방 흩어졌다. 유연은 애써 미안하다며, 헛소리를 내뱉은 것이니 못 들은 걸로 해달라고 말했다. 그렇게 무사히 넘어가나 싶더니 그 일이 있은 후부터는 어째선지 자꾸만 유연을 호출하는 일이 잦아졌다. 별 일도 아닌데 보고서는 잘 되어 가고 있는지 묻는다던가, 또 어떤 날에는 특별한 날도 아닌데 SOUVENIR로 초대해 요리를 대접해주는 등의 일이 종종 있었지만, 크게 개의치 않게 생각했다.

이 사람이 내게 왜 이러는지 그 의도가 너무 불분명하여 직원들에게 몇 차례 얘기를 한 적이 있었다. 처음에는 서로 협력관계를 계속 유지하기 위해서 그런 것이 아니겠느냐는 의견이 가장 많았었다. 지금은 이택언이 유연을 좋아하고 있는 것 같다는 의견이 많아졌다. 유연은 말도 안 되는 소리라며 믿지 않았다. 아무런 볼품없는 자신의 어느 구석을 보고 좋아하는지 의문이었다.

‘게다가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고 얘기했어. 나를 좋아할 리가 없잖아요.’

‘그 사람이 유연 대표님일 수도 있잖아요.’

‘…….’

‘사람 일은 정말로 모르는 거라니까요. 게다가 이 대표 정도면 꽤 괜찮지 않아요? 아무리 냉혈한이래도 자기 여자에겐 따뜻하겠죠.’

유영의 얘기에 유연은 본인도 모르는 사이에 고개를 끄덕였다. 딱히 틀린 말은 아닌 듯 했다. 겉으로는 차가워 보이는 사람이 연애 할 때에는 의외로 순애보적인 면모가 있고, 사랑하는 사람에겐 따뜻하고 다정한 모습을 많이 보인다는 카더라 얘기도 있으니까. 전에도 그런 모습을 한 번 보기도 했었고.

‘대표님에게 이렇게 다정다감한 면이 있을 줄은 몰랐네요.’

‘…그렇습니까.’

‘좋아하는 사람이 누구인지는 몰라도 그 분도 대표님의 이런 모습을 본다면 분명 좋아하지 않을까요?’

그 날도 어김없이 프레젠테이션을 위해 화예의 회의실에 방문했었던 날이었다. 프레젠테이션 준비를 위해 테이블 위에 자료들을 놓기 위해 제법 많은 양의 인쇄물을 챙겨 낑낑거리며 회의실로 걸음을 했다. 뒤에서 쳐다본 걸음걸이가 영 이상해보였던 모양인지, 언제 다가온 지도 모를 택언이 많은 양의 인쇄물을 건네받아 -반쯤은 뺏어간 모양새- 회의실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회의시간 5분을 남겨두고 프레젠테이션 준비를 끝마친 유연은 큰 산을 하나 넘은 것 마냥 마음을 쓸어내려 안심하며 택언에게 말했다.

택언은 상석에 앉아 자료들을 훑으며 유연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좋아하는 사람. 언젠가 유연에게 그리 얘기했던 것이 떠올랐다.

“오늘 시간 있으면 비워두세요. 유연씨에게 할 얘기가 있습니다.”

“아, ……네.”

프레젠테이션이 무사히 끝나고 두 사람은 근처 카페로 걸음을 옮겼다. 무슨 할 말이 있는지 한참이나 뜸을 들이던 택언을 가만 쳐다보던 유연은 괜히 빨대만 만지작거렸다. 대표실이나 회의실이 아닌 곳에서 이야기를 나누는 것은 처음인 것 같다. 어색해 죽겠다는 표정을 하고 있는 유연과는 달리 택언의 표정에는 변화가 없었다.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할까 잠시 말을 고르는가 싶더니, 앞에 놓인 커피를 한 모금 마신 후 결심이 끝났다는 듯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전에 제가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고 얘기한 거, 기억 합니까?”

“아, 네.”

“좋아하는 사람이 누구인지는 몰라도 나의 다른 모습을 보면 분명 좋아할 거라고도 얘기 했고요.”

“…그랬죠.”

주체가 없는, 붕 뜬 이야기에 유연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어서 지난 대화까지 끌어온 것인지 의문이었다.

“제가 좋아하는 사람은 유연씨입니다.”

“아.”

“…….”

“……네?”

빨대로 음료를 쪽쪽 빨다가 깜짝 놀라 그만 사례가 들고 말았다. 콜록콜록. 잔기침을 하며 놀란 눈으로 맞은편에 앉은 택언을 쳐다봤다. 현실을 자각하기까지 제법 시간이 걸렸다. 얼굴이 발갛게 달아오른 것은 그 후의 일이었다. 불에 덴 것처럼 뜨거워진 볼을 손바닥으로 문지르며 눈동자만 데록데록 굴리면서 어디에 시선을 둬야 할지, 무슨 말을 꺼내야 할지 망설였다.

두 사람 사이에 무겁게 내려앉은 침묵. 유연은 방금 자신이 무슨 말을 들었는지에 대해 곰곰 생각했다. 고개를 슬쩍 들어 이택언을 쳐다보니 자신에게 대답을 강요하고 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 태연한 행동에 유연은 고개를 돌렸다.

그 후, 다시 2개월. 고백을 받았지만 그 후로도 둘의 관계는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철저한 비즈니스 관계. 투자 하는 입장과 받는 입장에서 달라진 부분은 없었으나, 굳이 달라진 점을 찾자면 유연을 향한 이택언의 행동이었다. 어떻게 달라졌는지 딱 짚어서 말할 수는 없었지만 전에 없던 행동이 늘거나 하지 않았던 행동이나 말들을 가감 없이 유연에게 보였던 적이 벌써 여러 차례 있었다. 갑작스러운 태도 변화에 가장 혼란스러운 사람은 유연이었다.

“세상에.”

“…….”

“완전 빼도 박도 못하게 굳히기에 들어간 거군요.”

“그게 무슨 말이에요? 예준씨.”

“대표님이 몰라서 그렇지. 좋아하는 사람더러 단 둘이 여행을 가자고 제안을 할 때에는 이 사람을 완벽하게 내 사람으로 만들겠다는, 뭐 그런 거 아니겠어요?”

“그러니까 여행이 아니라 출장이에요, 출장. 그것도 사전답사.”

“그게 그거죠. 그것도 둘이서만 가는 건데. 게다가 이택언 대표님도 좋아한다고 고백까지 했다면서요. 그럼 말 다했지.”

유연은 고개를 절레절레 가로저었다. 표정이 좋지 않아 보이는 유연에게 무슨 일 있었느냐고 묻는 예준에게 이택언으로부터 좋아한다는 말을 들었다는 얘길 꺼내는 것이 아니었다. 고백에 대한 것도 제대로 생각하고 답을 할 겨를도 없이 둘이서 사전답사 차, 어느 섬으로 가잔 얘길 들었을 때에는 정말 어디로든 도망가고 싶었다. 아직 마음의 준비가 제대로 되지 않았던 탓이 컸다.

시원했던 회사 건물에서 벗어나자 온몸을 감싸는 따뜻한 바람이 훅 불어온다. 시간, 계절을 모두 잊은 채 프로그램에 대한 것들만 생각하며 지내온 터라 벌써 여름이 찾아온 것도 몰랐다. 몇 번째 여름인지 헤아리는 것조차 의미 없어졌을 때, 오지 않을 것 같았던 시간은 당장 코앞으로 다가왔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고 있습니까?”

“……사전 답사할 곳에 대해서요.”

“…….”

“아무것도 없는 곳에서 무얼 해야 할지, 최소한의 것들은 생각해둬야죠.”

처음 제안을 받았을 때에는 무슨 뜬구름 잡는 이야기를 하는 건가 싶었다. 대중적으로 잘 알려지지도 않은 섬이라니. 대체 어떻게 촬영을 해야 할지 가늠도 안 된다. 유연이 한숨을 푹푹 내쉬는 동안에 배가 출발한다는 신호를 알리는 뱃고동 소리가 귓가에 울린다.

처음 출발하기 전에는 온갖 걱정이 가장 먼저 앞섰는데, 배 시간을 찾아보며 시간만 잘 맞춰서 선착장으로 나와 배만 무사히 탄다면 크게 걱정될만한 일은 없다고 그랬다. 특히, 지금 가려고 하는 섬은 날씨의 영향도 크게 받아 오늘처럼 화창한 날씨라면 큰 문제가 없을 거라는 말도 덧붙였다.

섬에 도착한 후, 섬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며 촬영할만한 포인트를 찾았다. 대중적으로 많이 알려지지 않은 섬이라고 해서 정말 아무것도 없고 그러면 어떡하나 걱정이 되기도 했지만, 섬을 돌아다녀본 결과 그런 걱정이 무색할 정도로 경치는 무척이나 예뻤다. ……어쩌면 아예 촬영 방향을 바꿔야 할지도 모르겠네. 유연은 수첩에 빼곡하게 적어놓은 아이디어를 보며 작게 중얼거렸다.

“그나저나 정말 작기는 작군요. 저도 추천을 받아서 오기는 했는데.”

“대표님도 추천을 받기도 하는 군요. 이런 섬을 어떻게 다 아시는지 궁금했는데.”

“저라고 뭐든 다 알고 있는 건 아니니까요.”

섬이 그리 크지 않은 편이라 둘러보는 데에 시간이 오래 걸리지는 않았다. 이 섬에서 빠져나가는 배가 올 시간까지는 조금 남아 있어 이르게 선착장에 도착해 배를 기다리기로 했다. 섬에서 나가는 배를 기다리는 동안, 바로 옆에 앉아있는 이택언을 힐끗 흘겼다.

“뭘 그렇게 쳐다봅니까.”

“아, 아뇨. 제가 언제 쳐다봤다고…….”

갑작스러운 반응에 오히려 당황해한 것은 유연이었다. 어깨를 으쓱이곤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렸다. 선착장이라고 칭해지는 건물은 얼마만큼의 세월을 보냈는지 가늠이 되지 않을 정도로 오래되었다. 낡고 녹슨 것이 오히려 자연스러울 정도다. 숨을 들이 마시고 내뱉을 때마다 퀴퀴한 곰팡이 냄새가 코를 찌른다. 고개를 조금 들면 정면으로 보이는 벽면에 둥근 모양의 커다란 시계 하나와 작은 선풍기 하나가 걸려있는 것이 전부다.

이 곳에 있으니 모든 것들이 평화로워 보인다. 저 멀리 철썩이는 파도 소리. 째깍째깍 움직이는 시계 소리. 이따금씩 들려오는 새소리와 개구리 우는 소리. 유연은 가만 눈을 감고 귀를 기울였다. 도시에서는 쉽게 들을 수 없는 소리다. 이런 평화로운 기분을 얼마 만에 느껴보는 건지 모른다. 항상 시간에 쫓기기 바빴는데.

“그나저나 날이 갑자기 흐려져서 걱정이군요.”

“……네? 그럴 리가. 오늘 분명 화창했는데.”

택언의 말에 유연은 화들짝 놀라며 선착장 안쪽에 있는 작은 창문을 통해 하늘을 살폈다. 분명 여기 도착할 때까지만 하더라도 화창한 날씨였던 터라 섬을 빠져나가는 것 또한 어렵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집에 가지 못하게 된다는 상황은 전혀 염두에 두지도 않았다. 옆을 슬쩍 바라보니 전혀 걱정도 안 되는지 태평하게 핸드폰을 들여다보고 있는 모습에 괜스레 감정이 울컥하고 차오른다.

저 멀리서 잿빛 먹구름이 잔뜩 몰려오는 것이 눈에 보일 정도다. 화창했던 하늘은 순식간에 어두워졌다. 금방이라도 비를 퍼부을 것 같은 날씨에 유연은 땅이 꺼져라 한숨만 푹푹 내쉬었다. 진짜 어떡하지. 당장 섬에서 빠져나갈 방법이 없다, 먹구름이 걷힐 때까지, 파도가 잠잠해질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는 대답을 전해 들었을 때에는 세상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사이가 어색한 이택언과 함께 이 섬에 갇혀 있어야 한다는 사실은 조금 뒤에 깨달았다.

덜덜덜 소리를 내며 돌아가는 작은 선풍기로는 어림도 없었던 후덥지근한 공기에 찬바람이 섞여 시원해졌다. 언뜻 봐도 파도가 높다. 이 기세로는 오늘 안으로는 배가 못 올 것 같다.

[대표님, 언제 도착 예정이에요? 오늘 당장 결재해야 할 서류가 있는데.]

[오늘 못 올라갈 것 같아요. 조금 일이 꼬였어요.]

[그럼 이 서류는 어떻게 하죠? 일단, 거래처에 얘기는 해둘게요.]

[처리가 급한 서류라고 해도 당장은 처리할 수가 없으니까 어쩔 수 없죠.]

고은으로부터 도착한 문자에 유연은 우는 이모티콘도 곁들여 답장을 보냈다. 이 상황을 어떻게 타개해야 할지 고민하는 사이 후두둑하고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바다 위를 두드리는 빗줄기에 유연은 원망어린 눈으로 비를 퍼붓고 있는 하늘을 올려다보다 옆에 있는 이택언을 쳐다보다가 땅이 꺼져라 한숨을 푹 내쉬었다.

지붕 위의 기와를 두드리는 소리가 점점 거세진다. 아무도 없는 선착장에 정말로 단둘만 남았다. 예준의 말이 문득 떠올랐다. 왜 지금 이 순간에 그 얘기가 생각이 났는지는 모르겠지만, 괜히 마음이 싱숭생숭해진다.

상황이 상황 인만큼 방법이 없다보니 절로 머리가 차갑게 식으면서 현실을 직시할 수 있게 되었다. 고개를 돌려 옆을 보니 고개를 뒤로 젖혀 벽에 기댄 채, 눈을 감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날렵한 눈썹, 오똑한 콧대, 자신에게는 늘 독설만 내뱉던 입술까지. 비즈니스 관계로 만나지 않았더라면 잘생긴 얼굴에 분명 넘어갔으리라.

“지난번에 대표님이 얘기하신 거…….”

“…….”

유연은 잠시 말을 골랐다. 어찌되었든 자신은 고백을 받았고, 그 고백에 대한 답을 해주지 않고 애매한 태도로 어영부영하게 시간을 보내긴 싫다. 그것만큼 상대방에게 헛된 희망을 품게 해주는 것은 없다. 누군가에게 고백을 받아본 것이 너무 오랜만이라 설레는 감정도 낯설게만 다가왔었다. 게다가 전혀 자신을 좋아하는 것 같지 않던 인물에게서 받은 고백은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무슨 말을 꺼내야 할지, 어떤 말로 답을 해줘야 할지. 그 어떤 것도 생각나지 않았다. 그야말로 머릿속이 새하얗게 변했었다.

이택언은 유연과 일하는 지난 3년 동안 비즈니스 관계를 유지하면서 유연에게 좋아하는 티조차 한 번도 내지 않았던 사람이었다. 생각해보면 화예와 거래를 하는 다른 곳이나 다른 사람들에 비하면 자신이 지나치게 배려를 많이 받았다는 것은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하지만 그것이 편애이고, 감정을 티내고 있다고 받아들이기에는 어려운 점들 또한 많았다.

“……곰곰 생각해봤는데요.”

“…….”

왜 자신이었을까. 유연은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졌지만, 답을 찾아내지 못했다. EVOL이니, 뭐니 하면서도 결국 사람의 감정에 대해서는 어떤 말로도 정의 내리기 어렵고 다른 사람이 쉽게 평가할 수 있는 무언가가 아니었다. 고백을 받은 직후, 유연은 제 마음 속을 가만 들여다봤다. 비록 기획서에 독설을 날리지 언정, 유연이라는 인물에게는 한없이 다정했던 것 같기도 했다. 그래서 겁이 나기도 했다. 이 사람의 감정에 자신이 잡아먹히지는 않을까 두려웠다.

“지난 3년간 대표님에 대해 모르는 것들이 너무 많더라고요.”

“…….”

“그래서 대표님이 그때 그렇게 얘기했을 땐, 솔직히 조금 놀랐어요.”

놀라지 않았다고 하면 그건 거짓말이죠. 유연은 담담하게 제 속마음을 털어놓기 시작했다. 이런 상황이 아니라면 선뜻 말을 꺼내기가 어려웠을 것이다. 신발 코로 바닥을 툭, 툭 찼다. 발끝에 걸린 아주 작은 돌멩이 하나가 데구르르 굴러간다.

“……대표님에 대해서, 더 많이 알아가는 것도……좋을 것 같아서요.”

“…답을 이제야 듣는군요.”

“……아, 안자고 있었어요?”

“잠시 눈을 감고 있었을 뿐입니다.”

잠을 청하고 있는 듯한 자세에 유연은 끊임없이 물어보고 고민했던 것에 대한 답을 내렸다. 이택언에 대한 호감이 아주 없었던 것은 아니었으나 계기가 필요했다. 아주 사소한 거, 아주 작은 거라도 상관없는 계기. 기폭제 역할이 된 날씨는 그 계기가 되어줬고, 유연은 오랫동안 품어왔던 속마음을 속 시원하게 털어낼 수 있었다.

유연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택언은 몸을 틀어 유연을 품에 끌어안았다. 바깥의 풍경은 이미 땅거미가 짙게 내려앉아 어둑어둑해졌다. 창문을 두드리는 빗소리가 고요하게 울리고, 두근두근 뛰는 심장 소리가 아름다운 하모니를 이뤘다.

비가 오는 어느 여름날 밤이 이렇게 또 저문다.

혜르 _ 백기X유연
혜르.png

[백기X유연] 여름날의 36.5℃

W. 혜르

 

 

덥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유연은 덥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한낮 온도 36℃가 찍힌 여느 여름날이었다.

온도가 심각할 정도로 높은 편은 아니었지만, 습도의 영향으로 불쾌감이 형성됐다.

그야말로 불쾌지수 300%의 날씨, 이런 날에 외근으로 이곳저곳을 돌아다녔더니 온몸이 찐득찐득해지는 바람에 유연은 마치 지금 자신의 상태가 찝찝함을 의인화 시켜낸 것만 같았다.

이런 날엔 퇴근 후에 시원하게 샤워마친 상태에서 맥주 한 캔 딱 때려야 이 성가심을 풀어낼 수 있는 유일한 열쇠인 것 같았다

좋아. 오늘 금요일이니까. 집가면 무조건 맥주 때리고 기분 좋게 자야지.

금요일의 마무리를 기분 좋게 끝낼 생각에 유연은 절로 흥이 돌았다.

그렇게 흥에 젖어가던 찰나 문득 어떠한 생각이 흘려들어왔다.

뭔가 오늘따라 혼술하기가 아쉽네.

머릿속에 바로 스쳐가는 사람이 있었지만 만일 그 사람이 오늘 임무 나가있는 거면 어떡하냔 걱정에 유연은 휴대폰으로 향하던 손길에 멈칫거림이 깃들었다.

그렇다고 직원들을 잡아 같이 마시자고 하는 건 딱히 구미가 당기지 않았다.

유연은 망설이던 기색을 지우고 폰을 들어 방금 생각난 사람에게 전화를 걸었다.

통화연결음은 한두 번 울리더니 통화가 오길 기다렸다는 듯 바로 끊기고 수화기 너머로 백기의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보세요? 유연아 무슨 일이야?]

"아. 선배, 잠깐 통화 가능해요?"

[응. 통화 가능해.]

"아. 다행이다. 그… 다름이 아니라. 혹시 선배 퇴근 후에 시간 되나 해서요."

[물론이야. 시간 되지.]

"그럼 우리집에서 저랑 같이 맥주 마셔요."

[너네 집?]

"네! 오늘 뭔가 시원한 맥주가 땡겨서… 근데 맥주는 마시고 싶은데 오늘만큼은 다른 사람이랑 함께하고 싶어서 혹시나 하고 연락했죠."

[그랬구나. 난 좋아. 나중에 그런 일 있으면 나 불러.]

"선배 바쁘실까봐 좀 망설였는데. 그런 거 상관하지 말고요?"

[응. 그런 거 신경쓰지 말고. 너 부르고 싶을 땐 언제든.]

"에이~ 진심이라고 해도 그건 좀 힘들겠네요! 그래도 알겠어요. 선배."

유연의 말에 백기가 낮게 웃었다.

[그래. 그럼… 몇 시쯤에 데리러 갈까?]

"저 6시쯤에 업무 다 끝날 것 같아요."

[알았어. 그때 회사 앞에 있을 게.]

"네. 선배, 6시에 봐요!"

[응. 조금 있다 봐.]

선배 섭외 완료했고 남은 건 업무 뿐이네.

유연은 찝찝한 몸 상태를 뒤로하고 금요일이 가져다 줄 기쁨들을 가득 안고 남은 일정들을 마저 소화하기 시작했다.

 

 

*

*

 


달이 뜬 하늘, 귀를 여트막하게 울리는 여름 밤의 매미 소리와 희미하게 들려오는 TV소리, 그리고 맞닿아오는 백기의 뜨거운 체온, 그 모든 것이 그녀를 취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들었다.

두 입술이 마주한 거리는 서로가 내뱉은 숨을 마실 수 있을 정도로 가까웠다.

안 그래도 열대야가 기승을 부리는 날씨에 서로의 체온을 공유하고 설상가상 술이 가져오는 거짓 열기에 붉게 달아올라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연은 지금이 좋았다.

사랑하는 이의 체온을 느끼고 함께하고 싶을 때 함께 할 수 있는 지금이.

소파 앞 식탁에 덩그러니 서 있는 맥주캔은 공기에 찬기를 내주어 겉에 물기가 가득했다.

백기는 유연의 손에 들려있던 맥주캔을 빼앗아 혼자 있던 자신 몫의 맥주캔 옆에 두고는 브레이크 풀린 자신의 욕망을 드러냈다.

조금 높은 시선에서 백기를 마주보고 있던 유연은 어딘가 조급해진 호박색 눈동자를 바라봤다.

유연은 분위기가 달라진 그를 보며 묘한 기쁨을 느꼈다.

몇십 분 전에 유연이 했던 질문이 백기를 발동 시키는 주문이었던 게 분명했다.

유연의 질문은 간단했다.

키스와 뽀뽀의 차이는 무엇인가.

이런 낯간지러운 질문을 백기는 어떻게 답할지 궁금했다. 

아니 정확히는 술김에 TV 드라마 주인공들의 장면을 보고 언어를 막뱉었던 것 같다.

그 질문에 백기는 한참을 난감해하더니 결국 이렇게 답했다.

'그런 걸 물어보면… 행동으로 답해주고 싶은데. 그것도 괜찮아?'

자신한테 의사를 물어봤고 유연은 술김에 답했다.

'좋아요. 선배의 답 들려주세요.'

유연의 말이 끝난 후 바로 입술 위로 찾아온 백기의 답은 부드러웠다.

술김에 이성이 손쉽게 끊긴 상태였음에도 불구하고 유연의 입술을 가볍게 부딪혔다 떨어지고 다시 다가와 깊숙하게, 또 천천히 유영하며 들어왔다.

맞물린 것은 아이가 소중한 사탕을 먹는 듯 조심스러웠다.

그런 조그마한 자극에도 부끄러움이 번져 몸에서 열기가 올라와 붉은 끼가 낭자하던 얼굴에서 귀까지 홍조가 번저갔다.

달콤함에 취한 유연의 머리카락을 흐트러뜨리고 지나간 바람이 마치 폭풍 같았다.

백기의 긴 손가락이 바람이 꼬아둔 그녀의 갈색 머리칼 사이로 지나가며 뒷머리를 감쌌다.

그 행동에 화답하듯 그의 가슴꼐에 두었던 손을 홧홧한 목덜미를 지나 팔로 목을 감아 안았다.

이성을 잃은 백기는 예상외로 유혹적이었다.

은은히 흘러나오는 거실의 조명이 짙은 욕망에 젖어버린 호박색 눈동자를 비추었다.

자세를 고치느라 잠시 중단되었던 것은 다시 시작되었고 몰아치는 바람이 유연의 황홀한 숨을 앗아갔다.

창문에서 흘러들어오던 폭풍 같은 밤바람이 어느 순간 잦아들었을 때쯤 백기의 움직임이 멈췄다.

한순간 나갔던 이성이 되돌아왔는 지 조금 놀란 기색을 띈 채 백기는 맞물려 있던 입술을 부드럽게 떼고는 자신의 시선보다 높게 있는 유연의 눈을 바라보았다.

이 이상은 안 된다는 듯이.

"너 취했어."

"선배도 취했고요."

"더 가면,"

"괜찮아요. 취했지만 판단도 못할 정도로 취하진 않았어요. 저는 원하는데. 선배는요?"

"..네가 좋다면."

"좋다면?"

"나도 좋아."

백기는 자신의 다리 위에 안착해 있던 유연을 조심스럽게 제 팔로 들어올렸다.

"나도 너를 원해."

자신을 올려다 보며 원한다고, 허락해 달라는 눈빛을 보내는 붉게 물든 백기를 바라보던 유연은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그에게서 피어오르는 사랑스러움을 미소 짓지 않고선 도저히 감당할 수 없었으니까.

"갈까?"

"뭘 그런 걸 물어요, 선배. 그냥 가면 되는거지."

유연은 백기를 혼내듯 오직 저를 향한 호박색 눈을 바라보며 눈가 주변에 버드키스를 남겼다.

그것이 시작점이 된 듯 발 빠르게 함께 방 속으로 사라졌다.

 

 

**

 


열대야에 밤잠을 설치기 쉽상인 어느 날,

두 사람이 떠난 소파 앞 식탁에는 창문가에서 불어온 시원한 밤바람만이 주변을 맴돌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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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리카링 _ 기락X유연
카리카링.png

[기락X유연] 사계 2

W. 카리카링

 

 

무더운 여름날이었다. 천장에 선풍기가 탈탈탈 소리를 내며 돌아가고 있었고, 활짝 열린 창문은 햇살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기락은 곤히 자고 있는 유연을 바라보았다.

 

예쁘다.

 

기락은 유연을 계속해서 훔쳐보았다. 여름햇살이 그녀를 쓰다듬는 것 같았다. 가끔씩 불어오는 선풍기 바람이 유연의 머리카락을 움직이게 했다. 스치는 머리카락이 가려운지 그녀의 눈가가 찌푸려졌지만 눈을 뜨진 않았다.  

기락은 괜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반 야구 대항전 때문에 반에는 아무도 없었다. 야구 선수와 매니저 담당인 두 사람도 원래 운동장에 있어야 했지만, 유연은 열사병으로, 순서가 끝난 기락은 그녀를 부축하기 위해 양해를 구하고 잠시 빠져나왔다. 하지만 양호실은 잠겨 있었고, 고민 끝에 불편하지만 두 사람은 반에서 쉬기로 했다.

 

땅 -

 

금속이 부딪히는 소리가 멀리서 들려왔다. 이윽고 와아- 하는 함성도 들려왔다. 기락은 그 소리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유연을 계속 바라보았다. 계속 비춰지는 여름 햇살, 가끔씩 불어오는 선풍기 바람, 조용한 교실. 이 모든 게 그녀를 위해 자리한 것 같았다.

 

정말 예쁘다.

 

언제부터였던가, 기락은 유연이라는 작은 소녀를 신경 썼다. 등교 할 때도, 하교할 때도, 쉬는 시간이나 점심시간에도 기락의 눈은 유연을 쫓았고, 가까이 다가가고자 했다. 작년엔 다른 반이라 그저 볼 수밖에 없었지만 이번엔 같은 반이라 접점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 그럼...다른 방법을 찾아 볼게.

 

기락은 어느 봄날, 유연에게 서툴게 고백했던 말이 떠올랐다. 떠올리는 것조차 괴로운 지 머리카락을 쥐어짰다. 바보, 멍청이. 그는 작게 중얼거렸다. 이런 망한 고백을 누가 좋아한단 말인가. 그래서 사실 마음을 접고 싶었으나, 뜻대로 되지 않았다. 그러니까 지금 유연의 얼굴이 점점 커져 보이는 것처럼 그의 마음도....

 

“...뭐해?”

 

유연이 조용히 눈을 뜨며 물었다. 자다 일어나 살짝 감긴 목소리가 기락이의 가슴을 울렸다. 둥, 둥. 기락은 침을 꿀꺽 삼켰다. 어느 새 가까이 자신의 얼굴이 그녀의 얼굴에 가까이 다가가 있었기 때문이다. 얼굴이 점점 크게 보이는 건 그냥 착각이 아니었다.

 

“네 얼굴에...먼지가 붙어서 불어서 없애려고 라고 하면 믿을래...?”

 

두 사람 사이에 정적이 흘렀다. 유연은 눈을 천천히 깜박였다. 기락은 머릿속으로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지워지지 않을 흑역사가 또다시 생겨난 것이 고통스러웠다. 그것도 좋아하는 여자애 앞에서. 그는 그저 이 상황이 잘 무마되길 비는 것 밖에 없었다.

 

“...믿으면, 어떻게 되는데?”

 

기락은 두 눈을 크게 깜박였다. 생각과 다른 반응에 당황스러웠다. 핀잔을 주거나, 화를 낼 줄 알았다. 거짓말하지 말라면서. 그래서 지금 이렇게,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무슨 말이든 해야 했다.

 

“내..내가 불어줄까?”

 

유연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눈 좀 감아볼래?”

 

유연은 천천히 눈을 감았다. 기락은 조심스럽게 유연의 얼굴에 후, 후 입김을 불었다. 간지러운지 유연의 눈가가 파르르 떨리고, 입술 끝이 살짝 위로 올라갔다.

 

 

기락은 자신의 가슴 언저리에 어떤 것이 떨어지는 것을 느꼈다. 시선이 그녀의 입술 끝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입술이 바짝 마르는 느낌이 들었다.

 

“다 불었어?”

 

유연의 나른한 목소리가 기락을 현실로 되돌렸다. 어느 새 기락은 부는 것을 멈추었다. 그녀의 초콜릿색 눈동자가 기락을 바라보고 있었다. 머릿속에 필터링 되지 않는 말이 입으로 흘러나왔다.

 

“...있잖아. 나, 다른 것도 해도 되?”

 

기락은 침을 꿀꺽 삼켰다. 유연은 그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두 사람 사이에 정적이 흘렀다. 유연은 천천히 말했다.

 

“..뭘 할 건데?”

 

“.....궁금해?”

 

유연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기락은 또 한 번 침을 삼키고 말을 했다.

 

“눈.... 좀 감아볼래?”

 

유연은 천천히 눈을 감았다. 자세가 불편한지 몸을 들썩여 얼굴을 다르게 자리했다. 그러자 반쯤 가려진 그녀의 입술이 전부 드러났다. 입술도 그녀를 닮아 예뻤다. 기락은 홀린 듯 가만 바라보다 그 곳에 그의 입술을 맞추었다. 말랑한 느낌이 전신을 타고 퍼져 저릿한 느낌이 들었다. 같은 느낌을 받은 걸까, 그녀가 눈을 번쩍 떴다. 놀란 얼굴로 그를 보고 있었지만 피하지 않았다.

 

얼마간의 시간이 흘렀을까, 기락은 숨을 쉬고 싶었다. 하지만 입술을 떼고 싶지도 않았다. 그 두 가지 욕심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할 때 쯤, 유연이 깊은 숨을 내뱉었다. 입술에 여름의 열기만큼이나 뜨거운 숨이 느껴졌다. 그는 그 숨조차도 욕심이 났다. 그가 결심하고 입을 살짝 열었을 때였다.

 

“야! 주기락! 쉬니까 좋냐?!”

 

갑자기 뒷문이 벌컥 열리며 남학생들이 우르르 들어왔다. 야구시합이 끝났는지 모두들 땀과 물에 푹 젖어 있었다. 그와 동시에 기락은 쿠당탕탕 하며 요란하게 넘어졌다. 걸상을 짚으려다 헛짚어서 함께 넘어진 덕분이었다. 그 모습을 본 학생들은 배를 잡고 크게 웃었다.

 

“푸하하하! 야, 왜 그렇게 힘이 없어?!”

 

“몰라, 아파. 그래서, 이겼어?”

 

“당연하지!! 에이스인 네가 있었잖아. 아이스크림 받으러 가자!”

 

“우리 반 멋있다~! 모두 수고했어!!”

 

“근데 넌 얼굴이 왜 빨...으악, 컥! 야, 주기락! 말로, 말로 해!”

 

기락이 남학생들과 시끄러운 소리를 내며 나가고, 곧이어 하나 둘 여학생들도 들어오기 시작했다. 유연은 한참 있다 슬그머니 상체를 일으켜 세웠다.

마치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유연아, 너 괜찮아? 아까보다 얼굴이 빨간 거 같아.”

 

...는 실패 한 것 같았다. 유연은 친구에게 아직 어지럽다며 얼버무렸다. 친구의 뒤로 여름의 푸른 하늘이 창밖으로 펼쳐져 있었다. 아까까지 마주한 눈동자와 같은 색이였다.

 

유연은 아직도 열이 안 빠진 것 같다며 다시 엎드려 얼굴을 숨겼다. 딱히 거짓말을 한 건 아니었다.

태양 가까이에 있어서 더운 것뿐이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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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최 Twitter @Hy_3bun

푸른온도백기O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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